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2차 아편전쟁 (문단 편집) == 전개 == [[태평천국의 난]]으로 국가적 역량이 크게 쇠퇴하였던 청은 침공의 위협에 노출된 광둥성 일대 등 남부지방에서 [[제1차 아편전쟁]]과 같은 조직적 저항이 어려운 상태였다. 그래서 1856년 10월, 영국은 광저우를 공격, 거기에 주둔한 청의 지방군을 손쉽게 격파하고 점령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tako_fort.jpg|width=100%]]}}}|| || 대고포대의 모습 || 그 뒤 영국군은 발해만까지 북상하더니 1858년 5월엔 마침내 톈진 부근의 대고포대까지 진출해서 청군을 전멸시키면서 청나라를 위협하기까지 이른다.(제1차 대고포대 전투)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the_treaty_of_taijian.jpg|width=100%]]}}}|| || 톈진 조약 체결 장면 || 연이은 패배와 전쟁 수행능력의 부족, 국가적 역량 한계와 수도 함락 위험 등을 느낀 청은 1858년 6월 배상금 지급, 개항항구의 확대, 베이징에 외국 [[외교관]] 상주 허용, 기독교 공인, 장강 통행 및 외국인의 중국 내륙여행 자유 등을 골자로 하는 톈진 조약을 체결했다. 청과 각국은 톈진 조약을 체결하고 1년 뒤에 비준하기로 했다. 베이징에 가는 것을 당연한 권리로 여긴 영국군, 프랑스군은 조약 체결이 이뤄진 지 1년이 되는 1859년 6월에 베이징에서 비준하기 위해 북상하였는데 북당으로 상륙하라는 청국 정부의 요청을 무시하고 대고로 와서 해변의 장애물을 제거하다 [[보르지기트 셍게린첸]]이 지휘하는 대고 포대의 포격을 받아 큰 피해를 보았다.[* 영국 군함 4척이 격침되고 2척이 나포되었으며, 500명이 넘는 사상자가 났다. 당시 청군이 서구 열강에 비하여 낙후된 무기를 사용했던 점과 당시 투입된 연합군의 병력이 한개 대대+한개 중대 규모인 1,200여 명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굉장히 대단한 전과이다.](제2차 대고포대 전투) 이 사실이 알려지자 영국 언론은 중국이 조약을 파기했으며 보복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톈진 조약에는 장강 및 각 항구에 군함의 진입권을 명시했으나 '백하'에 대한 진입권은 명시하지 않았고 '군함이 위협행위나 해적 행위를 하지 않는다면 자유로이 진입할 수 있다'라는 조항이 있었으므로 청군이 설치한 장애물을 자기 마음대로 제거하려 한 것은 엄연한 위협행위이자 도발이었다. 이것은 영국이 조약을 먼저 파기했다는 것이고 러셀 외무대신이나 조약을 비준하러 온 특명전권대사인 브루스 역시 이 사실을 인정했다. 반면 미국은 북당에 상륙하라는 청국 정부의 요청을 수용하고 베이징으로 가 대통령의 친서를 전하고 북당에서 비준서를 교환했다. 하지만, 영국 언론과 정치인들은 청나라 측의 비열한 기습공격과 포로에 대한 가혹행위를 주장하며 여론을 호도하고 이에 맞춰 당시 지휘관이었던 패장 호프제독에게 바스훈장까지 수여해주었다. 청과 영국, 프랑스의 갈등은 폭발해 영국과 프랑스 양측이 연합해 청을 공격하기로 했다. 청으로선 불행히도 안 그래도 강력한 연합군의 전력은 크게 증강된 상태였다. 일단 연합군이 확실한 승리를 위해 '''수도 [[베이징]] 함락'''을 목표로 삼으며 전력을 증강했고, 전쟁 초중반기에는 동시에 진행된 [[세포이 항쟁]]으로 영국군이 인도에 주력하고 있었지만, 전쟁 후반기에는 세포이 항쟁이 종식되면서 인도에 묶인 병력을 대거 차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최종적으로 영국은 한개 [[사단]] 규모의 지상군 약 20,000명에 173척의 병력을 동원했고 프랑스는 두개 [[연대]] 규모의 병력 6,300여 명과 군함 33척을 동원했다. 베이징으로 진격하기에 앞서 [[발해만]]의 주요 항구를 모조리 초토화하고 점령한 영-프 연합군은 러시아 공사 이그나티예프의 정보를 받아 방어시설이 없는 북당에 상륙해서 문제의 대고 포대를 후면에서 공격해 수비군을 전멸시키고, 포대를 초토화했다.(제3차 대고포대 전투) 이에 협상을 다시 개시했으나 협상은 결렬되었고 마침내 8월 3일 [[톈진]]에 상륙하여 수비군을 격파하고 점령한다. 결국 9월 18일 베이징에서 불과 20km 밖에 안 떨어진 [[퉁저우구(베이징시)|퉁저우]]를 함락시켰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팔리교_전투.jpg|width=100%]]}}}|| || 팔리교 전투 장면 || 9월 21일, 퉁저우에서 베이징으로 가는 관문인 팔리교에서 벌어진 팔리교 전투에서 셍게린첸이 이끌었던 팔기군 12,000명이 포함된 3만명의 방어병력을 만났고 결과는 청나라의 참패[* 영국,프랑스군은 불과 5명의 전사자와 9명의 부상자를 낸데 반해, 청나라군은 최소 1,200명에서 많게는 10,000명 정도의 사상자를 냈다.], 결국 팔리교는 연합군에게 넘어갔고, 베이징으로 가는 길이 열려버렸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원명원 중국.jpg|width=100%]]}}}|| || 폐허로 변한 원명원의 잔해 || 연합군이 수도 근처까지 왔다는 소식에 공포에 질린 [[함풍제]]와 숙순 등의 주전파는 일제히 [[청더시|열하]]로 달아났다. 그리고 10월 6일 베이징 외곽에 도착한 연합군은 청 황제의 개인정원이자 전 세계에서 진상된 각종 물건들을 모아놓은 보물창고였던 [[원명원]]으로 진격해서 10월 18일까지 전부 약탈한 후 완전히 때려부수어 파괴해버렸다.[* 참고로 여기서 털린 각종 보물 또는 유물들이 오늘날 가끔 경매에 나오거나 우연히 발견되곤 한다. 예를 들어 한 영국 가정집에서 우산/지팡이꽂이 썼거나 골동품 매장에서 1500원 주고 산 도자기들이 [[가경제]], [[건륭제]]의 화병으로 밝혀져 수십억원에 다시 중국으로 팔려간 사례가 있다.[[https://www.joongang.co.kr/article/23591304#home|#]]] [[청더시|열하]]로 도망간 황제에게 보내는 연합군의 경고였다. 결국, 청은 저자세로 나올 수 밖에 없었고, 러시아의 중재로 [[베이징 조약]]을 체결하여 톈진 조약에다가 추가로 개항장을 늘려야만 했고 배상금도 늘어났으며 홍콩에 접한 [[구룡반도]]까지 추가로 할양해야 했다. 여기에 통상/선교의 자유와 중국의 내륙 수운인 양쯔강에서의 군함 항해까지 인정하는 등 온갖 굴욕을 당해야 했다. 그리고 [[러시아]]에는 이 조약을 중재했다는 명분으로 [[연해주]]를 내줘야 했다. 게다가 말이 좋아 중재지 러시아도 청나라의 영토를 노렸기에 여차하면 연합군에 합류할 움직임을 보였다. 즉 협박이었다. 베이징이 점령되자 당시 청나라 조정은 다급한 나머지, 태평천국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신식 군대를 이끌고 태평천국군과 대치하던 [[증국번]]과 [[이홍장]]에게 병력을 베이징으로 보내라고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증국번과 이홍장 입장에서 이건 받아들이기 힘든 명령이었다. 아직 난이 진압되지 않는 상태에서 병력을 보냈다간 전황의 균형이 무너질 위험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당시 베이징 일대의 상황을 분석한 증국번과 이홍장은 어차피 병력을 보내봤자 도움도 안되고 시간도 늦는다고 판단하고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다만 대놓고 가지 않기엔 조정의 명령을 어기는 격이 되는지라 크게 의미가 없는 실무적인 질문 보고를 하며 시간을 끌었고, 곧 베이징 조약이 체결되며 북상 명령은 취소되었다. 이것은 이미 청나라 황명이 더 이상 아무 의미가 없어졌다는 것을 보여 주는 에피소드이기도 하다.[* 후에 [[청일전쟁]]의 [[황해 해전]]으로 청나라 황제는 완전히 권위를 상실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